날씨가 너무 좋아 집에 있기 싫은 저녁이었다. 서울이었으면 뭘 했을까. 의미 없는 질문이다. 이 저녁을 어떻게 보내면 쓸쓸하지 않을까 생각하다 혼자서도 재미있을 듯한 바를 찾아보기로 했다. 좋은 술집 찾는 건 자신 있다.
윌리엄스버그에서 그린 포인트를 향해 걸었다. 윌리엄스버그는 서울로 치면 성수동 같다. 샤넬 코스메틱, 에르메스 리빙, 룰루레몬, 알로, 르 라보 등 큼직한 브랜드의 매장이 많이 들어섰다. 맨해튼보다는 아늑하지만, 너무 매끈하달까. 멋스럽지 않다. 조금 더 안쪽에 있는 그린 포인트가 편안하고 멋쟁이도 많다.
분위기 좋은 바는 몇 군데 보이는데 다들 삼삼오오 놀고 있어 혼자서는 심심할 것 같다. 후보로 한 곳을 꼽아놓고 조금 더 걷는다. 느낌 좋은 와인샵이 보인다. 들어가서 한 바퀴 둘러보곤 물었다. “혼자 와인 한잔하려고 하는데, 근처에 좋은 바 추천해 줄 수 있어?” “그냥 맨날 다니는 곳들이라 갑자기 이름이 생각 안 나네, 잠깐만.” 술집 추천은 술꾼에게 받아야 한다. 알려준 두 군데 중 가까운 곳으로 가 본다. 길이 눈에 익다. 아마 작년에 규영 언니와 갔던 곳인 것 같다.
옆에 앉은 사내는 레드 와인 한 잔을 앞에 두고 고사를 지내는 듯하다. 먼저 말을 걸었다.
“와인이 마음에 안 들어?”
“아니, 괜찮아. 좀 fruity 하지만. 넌? 내꺼랑 다른 거 같은데.”
“뭐, 괜찮아. 훌륭하진 않아.”
“내꺼 마셔볼래?”
“그래! 너도 원하면 내꺼 마셔봐.”
“난 됐어.”
Trevor, 29살. 미안하지만 마흔은 되는 줄 알았다. 뉴저지에서 나고 자라 뉴저지에 있는 대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했고, 은행에 취직했다. 기업 투자를 위한 채권… 관련된 일을 한다는 것 같다. 유럽사 그중에서도 시민혁명에 관심이 있어 역사를 전공했다. 그 후 왜 금융업계에 종사하게 됐는지는 뭐, 물어봤지만 안 물어봤어도 알 만한 이유다. 오전 8시까지 출근하고 주로 밤 9시 넘어 퇴근한다. 2년 차까지는 이보다 훨씬 늦게 퇴근했다. 점심은 집에서 싸 간 샐러드를 자리에서 먹고 저녁은 집에 와서 해 먹는다. “Sweet Green에서 풀떼기를 20달러 주고 사 먹고 싶진 않으니까.” 왼쪽 손목에서 롤렉스 시계가 반짝였다.
트레버의 말투는 ‘섹스 앤드 더 시티’에서 샬럿의 게이 친구이자 웨딩 플래너인 마리오 캔턴(Mario Cantone)을 연상케 했다. 눈빛을 봤을 때 게이는 아닌 것 같다. 올리브 한 그릇을 시키더니 내게도 권한다. 플러팅인가. 사양해야 하나. 미국 사람들 워낙 살갑지 뭐, 대충 넘기고 하나 집어 먹는다. 먼저 일어나며 원한다면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한다. “에, 너 술 마셨잖아.” “아무렇지도 않아.” “나는 술 마시고 운전하는 차는 안 타. 제안은 고마워.” “그래, 또 봐.” 우리의 ‘밥 한번 먹자’가 미국인들에게는 ‘또 봐’인 듯하다. 아니지, 그보다 더하다. 거의 ‘잘 가’ 대신 ‘또 봐’다.
미국에 오래 산 사람들의 스레드 포스팅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파티에서 한참 스몰 토크를 주고받고도 다음날 길에서 만나면 아는 체를 안 한다고 한다. 몇 번의 스몰 토크를 통해 서로 맞는지 안 맞는지 가늠하고, 맞는다는 판단이 설 때야 인사하는 사이가 된단다. 아직 여러 번 대화 나눈 상대가 없어 사실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스치며 대화 나눈 사람 중 기억에 남는 몇 명이 있다. 다시 마주치면 인사 건네보려 한다. 쌩하고 지나가면... 뉴스레터 친구들에게 위로 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