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잘하고 싶은 마음은 언제부터였을까. 처음 영어를 배운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도어락이 없던 시절, 열쇠가 없어서 현관문 앞에 앉아 엄마를 기다리는데 앞집 할머니가 나오시더니 들어오라고 하셨다. 아몬드가 들어간 두툼한 허쉬 초콜릿을 주셨던 기억. 할머니, 할아버지는 미국에서 자녀들과 지내다 한국에 들어오신 거라고 나중에 엄마에게 들었다. 처음 앞집에 간 날이 처음 영어를 배운 날인지는 모르겠다. 우리 집과 같은 구조인데 더 풍요로운 냄새가 나는 그 집 거실에서 할머니가 그려놓은 점선을 따라 알파벳을 그렸다. 공부는 혼자 하는 거라며 학원에 보내지 않은 아빠 덕분에 (당시는 ‘때문에’라고 생각했으나 돌아보니 덕분이다) 하교 후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종종 앞집에 가서 영어를 익혔다. 얼마쯤 지났을까. 할머니가 다시 미국에 들어가시게 됐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미국인 선교사들이 선생으로 있는 학원을 알려주며 나를 보내라고 하셨다. 아빠도 영어는 혼자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 건지 난생처음 학원에 다니게 됐다.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영어로 영어를 가르치는 곳이었다. 그때 처음 ‘나만 못 알아듣네’ 하는 기분이 생긴 것 같다. 열 명 남짓 되는 다른 아이들은 제각각의 수준으로 잘도 대답했다. 나는 그저 보기 드문 서양인과 교류하는 게 재미있었다. 여기서 영어 실력이 드라마틱 하게 늘었으면 <영어, 나처럼 공부해라> 책을 썼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만두던 날까지도 수업을 잘 알아듣진 못했던 것 같다. 성과가 있었다면 중학교 1학년 첫 영어 시험부터 수능 외국어영역까지 ‘왜인진 모르겠지만 느낌에 정답 같은 것’을 고르면 대부분 맞았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영어에 익숙하지만 잘하지는 못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산다. 쭉 한국에 살았는데 이 정도면 잘하는 거지, 하며 어떤 수준에 머문다. 시간 들여 공부해 볼까 하다가도 ‘한국어 필력도 모자란데 영어를 공부한다고?’ 하는 이상한 자존심에 관뒀다. 회사에서 나오는 어학 지원금으로 주 1회 40분씩 캐나다에서 자란 또래 여자애와 대화하면서 나름대로 하고 있다 퉁쳤다. 그런데 지금은 마침 미국에 있으니까. 보이고 들리는 게 다 영어니까. 미국에서 한국어 공부하는 건 뭐랄까, 수학 시간에 사회 공부하는 모질이 같으니까. 이참에 영어 실력을 좀 향상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셀프 어학연수?
그리하여오늘의규칙이정해졌다. 오늘이라기보단당분간의규칙이다. 특별히하고싶은게없는날엔카페에가서영문서적을읽고쓰자. 좋은문장은외워보자. 어쩌면 이번에야비로소영어실력이드라마틱하게늘지도모르겠다. 그러면뉴스레터친구들에게 "영어, 나처럼공부해라"알려줘야지. 오늘읽을책은 1972년에 출간한 존버거(John Berger)의대표작<Ways of Seeing (다른 방식으로 보기)>이다. 한국어로한번읽어서모르는단어가많아도맥락을이해할수있다. 회화가소재지만제목그대로 '보는방법'에대한글이다. 미술에관심없어도재미있게읽을수있으니연휴동안읽을책을찾고있다면시도해보시라. 얇고, 그림이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