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할아버지 영정사진 찍어드리기
필라델피아에 고모할머니, 할아버지가 사신다. 뉴욕에 올 때마다 들린다. 한국에 있는 다른 식구들은 만난 지 20년이 넘었고 가끔 미국에 들락날락하는 나만 얼굴 보고 지낸다. 이들에겐 내가 유일한 손녀여서일까. 직계 조부모 댁에 갈 때보다 훨씬 더 ‘할머니집’에 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항상 부러워했던 기차역에 마중 나와 “아이구 내 새끼!” 하며 부둥켜안는 그 무드가 여기엔 있다.
40년생과 44년생. 언제 또 올 수 있을까, 몇 번이나 더 만날 수 있을까 마음이 찡하다. 두 분 돌아가시고 나면 미국 땅에 가족 하나 없는 삼촌은 또 어떻게 하나 오지랖이 뻗친다. 집 구석구석 눈에 담고 사진도 찍는다. 반평생 사신 이 집도 언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삼촌, 할머니 할아버지 영정사진 찍으셨어?”
“장례식 하지 말래. 사람들 오는 거 싫다고 조용히 묻으래.”
“그래도 사진은… 내가 찍어드릴까 했는데.”
“됐다고 할 걸? 니가 물어봐.”
전략을 바꾼다. 영정사진이라고 말할 필요 없는 것 같다.
“할머니, 최근에 찍은 사진 있어?”
“없어. 니가 찍어줄래?”
“응, 카메라로 찍어줄게.”
“그럼 옷 갈아입어야지. 여보, 지현이가 사진 찍어준다니까 옷 갈아입고 나와. 그거 말고 회색 바지 입어.”
“할머니, 한복 없어?”
“한복은 구찮어.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로 입었는데 어때?”
난 집안이든 집 앞이든 하여튼 집에서 찍으려고 했는데 할머니 생각은 다른 것 같다. 다이너(Diner)에 들어가 자리를 잡더니 “자, 찍어. 여보, 카메라 봐.” 그래, 뭐.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매일 같이 점심 드시러 오는 곳이니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멀리, 가까이, 같이, 따로 계속 찍는다. “할머니, 좀 웃어봐.” 할아버지가 할머니 옆구리를 간지럽힌다. “이 여편네는 간지럼도 안 타.” 할머니가 아주 잠깐 수줍은 아내 같은 표정을 짓는다.
할머니는 오른쪽 귀가 잘 안 들린다. 할머니 말론 둘 다 귀가 안 들려서 큰 소리로 대화하는 거라는데, 할아버지는 그냥 말해도 잘 들으신다. 벼락같은 목소리로 잔소리를 하곤 할아버지가 받아치면 “뭐라는지 안 들려!” 하며 홱 돌아선다. “으휴, 안 맞아 안 맞아.” 저렇게 안 맞는데 어떻게 50년을 살았을까. 할머니는 말한다. “다 하나님 은혜야.” 할아버지는 말한다. “(돈 버느라고) 별 보고 나가서 별 보고 들어왔는데 싸우긴 뭘.” 그전에는 얼굴 보는 시간이 적어 부대낄 일 없었는데 은퇴하고 나니 서로 피곤하다는 입장이다.
80년대 미국 이주설을 듣고 있으면 정말 하나님이 보우하사 여기까지 오셨구나 싶다. 영화 속 장면에 할머니 할아버지 얼굴을 넣어 상상하게 된다. 작년까지만 해도 말씀이 별로 없으셨던 할아버지가 이런저런 얘기를 풀어놓으신다. “영감이 니가 와서 좋은가 부다. 하긴, 이걸 누구한테 얘기하겠냐. 가족이니까 하지.” 가족. 가족. 스물넷이 될 때까지 얼굴 한 번 본 적 없어도 가족.
삼천 달러 들고 캘리포니아에 왔다. 골프장에서 일하고 병원 청소했다. 겨우 자리 잡으려는데 사정이 생겨 필라델피아로 옮겼다. 삼촌이 열 살 때였다. 세차를 했다. 타이어에 낀 모래 빼는 게 여간 일이 아니다. 납땜도 했다. 우주정거장 만드는 데 쓰는 부품이었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맞더라도 이겨야 한다. 그래야 우습게 보지 않는다. “요즘 애들은 나고 보니 다 있어서 방자하지. 그러니까 다들 빨갱이 짓하는 거 아니야. 우리 식구 중에도 빨갱이 있냐?”
숙소도 제대로 안 구하고 뉴욕에 가는 날 보고 “그러다 무슨 일 생기면 어쩌냐”고 친구들이 걱정했다. “할머니네 가면 돼.” 마치 마술카드가 있는 것처럼, 대단한 빽이 있는 것처럼. 주머니에 한 푼 없어도 등 뉠 곳이 있다는 사실을 멀리 와서야 깨닫는다. 늘 거기 있어서 대단찮게 여겼던 가족의 존재가 선명해진다. 잘해야지. 잘해야지. 오늘도 다짐은 해 본다.